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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리차드 클레이더만 내한공연-전주

기간

2013-04-13~2013-04-13

시간

19:00 (105분, 인터미션 포함)

장소

모악당

가격

VIP 88,000원 R 77,000원 S 66,000원 A석 44,000원

할인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유료회원할인
   문화 4매 30% / 예술 4매 20% / 사랑 2매 20% / 전당 1매 10% 할인
청소년할인 [만 18세 미만 또는 고등학교 재학중인 학생]
   30% 본인만 적용(학생증 현장제시, 없을시 차액 현금지불)

주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학교법인 예원예술대학교

문의

(063)270-8000

공연소개


267개 골든 디스크, 70개 플래티넘 앨범 7,000만장이 넘는 음반 판매기록, 800여 타이틀곡 발표 1990년대 초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음반 판매고로 기네스북에 등재 ‘피아노의 시인’, ‘로맨스의 왕자’, ‘우리시대의 베토벤’등 많은 애칭을 가진 리차드 클레이더만이 30여년의 감성적인 연주 실력을 바탕으로 한국 팬들을 찾아온다. 내한공연 때마다 매진을 기록하였고, 한국 가수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한국 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았었다. 그런 그가 다시 내한하여 한국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준비를 하고 있다. 리차드 클레이더만 Richard Clayderman 모국어 불어보다 악보를 더 능숙하게 읽은 신동 1953년 12월 28일에 태어난 Philippe Pagès(리차드 클레이더만의 본명)은 일찍부터 피아노를 접하게 되었다.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쳐 훗날 아들의 성공에 기반이 되도록 하였다. 리차드 클레이더만이 여섯 살이 되던 해에는 모국어인 불어보다 악보를 더 능숙하게 읽었다라고 말했다. 12살에는 음악원에 입학하였고 16살에는 일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로서 미래가 촉망되는 인재였다. 하지만 얼마 후에 고전음악에서 현대음악으로 전환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는 무언가 다른 것이 하고 싶었기 때문에 몇 명의 친구들과 록 그룹을 결성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힘들고 고달픈 시간들 이었다. 조금의 돈이라도 생기면 악기를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샌드위치를 먹기 힘든 지경에 다다랐고 결국 17세 때 위궤양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클레이더만은 말한다. 그의 아버지가 위중해지면서 그를 재정적으로 도울 수 없게 되자 클레이더만은 생계를 위해서 반주자와 세션 음악가를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나는 그 일이 즐거웠고 수입 또한 그 때로서는 꽤 좋은 편이었다. 비록 그 일이 내가 될 수 있었던 탄탄한 기반이었음에도 나는 떠나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재능은 곧 눈에 띄어 Michel Sardou, Thierry LeLuron 그리고 Johnny Halliday같은 프랑스 스타들의 반주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자신의 야망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에 그는 “난 정말 스타가 되고 싶지 않다. 그룹에서 연주 할 때와 반주자가 되면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Olivier Toussaint을 만나 곡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받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은 1976년에 극적으로 바뀌게 되는데 Olivier Toussaint라는 유명한 프랑스 레코드 제작자의 전화를 받고 나서이다. Paul de Senneville(폴 드 세느비유)는 부드러운 발라드를 녹음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Paul은 새로 태어난 딸 “Adeline(아드린느)”를 위해 발라드를 작곡했고 당시 23세였던 Philippe Pagès는 다른 20명의 오디션 신청자와 함께 오디션을 본 후 그 일을 따내고 스스로가 놀랐다고 한다. “우리는 그를 본 순간 빠져들었다. 그의 개성 있고 잘생긴 외모와 매우 특별하고 부드러운 연주가 우리를 감명 깊게 만들었고 빠른 결정을 할 수 있게 하였다.”라고 Paul de Senneville는 말했다. Philippe Pagès의 이름은 Richard Clayderman으로 바꾸었고(외국인이 발음하기 쉽도록 그의 증조할머니의 성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의 싱글앨범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는 38개국에서 2천 2백만 장이 팔렸고 기네스북에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피아니스트’로 기록하였다. Olivier Toussaint는 “내가 그와 계약 했을 때 나는 그에게 만 장만 팔아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디스코가 유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발라드가 승산이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것이 크게 히트를 칠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베토벤 이후 피아노를 가장 대중화 시킨 연주자 이것은 뛰어난 성공사례가 되었고 리차드 클레이더만은 독특한 피아노 스타일로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었다. 지금까지 그는 1,200곡을 녹음했고 독일 기자는 “그는 틀림없이 베토벤 이후의 누구보다 피아노의 대중화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다.”라고 그를 표현했다. 기록적인 음반 판매 리차드 클레이더만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클래식과 팝의 결합을 통한 레퍼토리를 통해서 “뉴 로맨틱”스타일을 창조했다. 그는 대략 9천만장의 앨범 판매와 267개의 골드디스크, 70개의 플래티넘 디스크를 발표하여 세계적으로 대단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로맨스의 왕자”는 단순히 기록적인 아티스트가 아니었다. 사실 그의 수줍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대에서는 모든 것들은 완벽하게 하기 때문에 그의 콘서트는 ‘Spectacular’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나는 무대에서 청중들과 함께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연주하는 것이 좋다. 콘서트에서 나의 10명의 뮤지션 또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감정의 모든 종류와 다른 템포, 리듬 그리고 스타일이 섞이는 것이 좋다.”라고 말한다. 더욱 깊어진 음악성 리차드 클레이더만이 들려주는 낭만적이면서도 고전적인 품위가 넘치는 연주는 어느 곡이나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고 가슴 속에 오래오래 간직된다. 30여년의 연주와 창작 활동으로 더욱 깊어진 음악성은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통해 세계 팬들로부터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는 연주자로 매년 프랑스외의 나라에서 250일 동안 200번 이상의 많은 공연을 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그의 연주가 누구에게나 편안한 느낌을 주면서도 흔히 들을 수 없는 따뜻하고 매끄러운 연주기법과 세련된 무대 매너로 만들어 나가는 청중과의 강한 유대감 때문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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