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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극 - 꿈꾸는 나라

기간

2005-11-11~2005-11-12

시간

11일 19:30/ 12일 17:00

장소

연지홀

가격

일반 1만/ 학생 7천

주최

문의

063-277-7440

공연소개

작     의
 해방 60주년이 되었지만 그와 함께 야기된 분단의 고통은 우리의 땅 한반도에 여전히 긴 그림자로 남아있다. 최근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과 분열은 우리가 받았던 이데올로기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큰 것인지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상처는 한국현대 예술사에도 막강한 영향을 드리우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 이는 단순히 예술사의 왜곡 뿐 아니라, 예술가에게도 직간접의 질곡을 가해왔다. 예술가의 사상적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진정한 예술혼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연 출 의 도
<꿈꾸는 나라>는 연극을 꿈꾸는 한 예술가가 시대라는 수레바퀴에 어떻게 짓밟힐 수 있는 지, 예술과 정치와는 어떻게 그 궤를 함께 하고있는 지 고민해보고자 하는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꿈꾸는 나라>는 개인사이면서, 분단사를 다룬다. 분단된 땅에서 그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함세덕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우리가 사는 오늘, 이 땅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연출 의도
 ‘꿈꾸는 나라’는 정치현실의 나라이기도 하고, 예술의 나라이기도 하다. 즉, 해방직후 한반도에 만들고 싶었던 이상적 나라인 한편, 연극의 꿈을 실현시키는 무대를 중의적으로 상징한다. 이런 북합적인 상징관계를 원활히 무대에 구현하기 위해, 이 작품은 두 개의 시점을 교차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현재의 시점, 그리고 해방공간의 시점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그림이 추가된다. 곧 함세덕의 실제 작품 내 상황이다.
  현재와 과거는 작품의 의도를 서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극적 설정이며, 함세덕의 연극작품은 함세덕의 체험과 더불어 내면적 갈등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이것은 작가의 체험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관찰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기본적인 소재와 상황을 제외하고는 픽션이 대부분이다. 함세덕의 일반적 행적만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고, 구체적 행위나 다른 등장인물은 가공의 인물들이다. 다만 이 픽션이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의 내적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는 믿음으로 구성되었음을 밝혀둔다.

작품 줄거리
  월북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된 이후 가장 주목받았던 극작가로 함세덕을 꼽을 수 있다. 전반적으로 희곡에 대한 연구풍토가 열악하고 다루는 범위도 몇몇 작가에 국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함세덕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논의는 짧은 기간에 상당한 진전을 보여왔다. 그뿐 아니라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동승>, <무의도 기행> 등의 작품들이 무대공연을 통해 일반에 꾸준히 소개되고 있는 양상이어서 함세덕에 대한 관심 집중은 쉽게 약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와 같은 관심은 해금작가라는, 시대적 특수성에 기인된 단기간의 호기심 충족의 면도 있겠지만 함세덕이란 작가가 가지고 있는 다층적 이면도 꾸준한 관심을 끄는 바 무시하지 못할 힘으로 작용하리라 생각된다.
  함세덕은 일제 식민 말기와 해방기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격랑기 한복판을 살다 간 작가로서 당시 혼란했던 정치, 사회적 상황과 그 안에서 고민해야 했던 지식인의 사상적 흐름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 무렵 작가들 중에서는 보기 드문 전업적 희곡작가였으며, 뛰어난 감각과 열정으로 유치진과 비견되는 완성도 높은 희곡들을 남겼다. 그러나 주어진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는 작품세계의 변모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친일, 모작, 사상시비가 늘 뒤따랐다.
일부에서는 그를 '모방의 천재에 지나지 않는다'며 '감각이나 드라마투루기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지만 연극사에 남는 문제작은 별로 못 남긴 작가'로서 '견고한 철학과 비젼의 부족으로 인해 계속 변절을 거듭'했으며 '불운한 현대사를 살면서 가장 좋지 못한 연극적 예범을 보여준 작가'로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좌익작가들에 대한 거부감으로 지나친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드러내 는 일이다. 우리 현대연극사의 출발이 극형식으로부터 각종 사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이식의 단계였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모방과 모작의 문제는 불가피한 문제로 치부될 수 있으며, <산허구리> 같은 경우 모작 대상으로 거론되는 <바다로 간 기사>와 배경, 비극구조가 유사하지만 '훨씬 더 비극적으로, 한국적으로 소화, 재창조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음을 감안하면 이 같은 평가는 유보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작품활동 초기에 사실적 낭만주의를 토대로 작품을 썼던 함세덕이 일제 말 현대극장에서 친일 어용극을 유치진과 함께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는 급격히 좌익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도 그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나오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해방기의 그의 활동이 시대적 조류나 정치적 압력에 쉽게 영합하는 천박한 작가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이 바로 그것이다.
<고목>은 함세덕이 월북하던 해 발표한 작품으로 현재 남아있는 그의 희곡 중 마지막 작품이다. 고리대금업자이자 대지주인 박거복의 집 마당에 대대로 수호신처럼 지켜내려온 행자나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웃들과의 갈등, 가족들간의 불화, 정치모리배들과의 야합과 갈등 등을 통해 당시 시대상황을 직, 간접으로 풍자해낸 이 작품은  함세덕의 좌익활동과 월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위와 맞물려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해방이 되고 2, 3년간 강력한 지도적 목소리를 내었던 조선연극동맹 기간 동안 함세덕은 부위원장을 맡는 등 활발한 조직 내 활동과 더불어 쉴러의 작품<群盜>를 번안한 <山賊>,3.1운동을 극화한 <기미년 3월 1일>, 1947년 3월 제 2회 3.1절 기념연극제에 출품된 <태백산맥> 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함세덕의 이 무렵 활동에 대해, 평소 좌익을 싫어하던 그의 사상적 기질을 생각해 볼 때, 정치적 압력에 어쩔 수 없이 휘말리며 자신의 문학세계를 잃어버린 패배자의 모습으로 설명하는 측도 있다. 어느 정도 수긍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함세덕 본인이 스스로 진보적 세계관을 향한 사상적 전환을 꾀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해방기 함세덕의 대표작으로 <태백산맥>을 거론한다. 그의 좌익사상이 확고해지는 시점으로 이야기되기도 하면서 '금후 민족연극운동의 지침이 되었다'고 평가되는 이 작품은 1947년 2월 국도극장 공연시 상연중지와 재검열 등의 우여곡절 가운데서도 같은 3.1기념공연인 조영출의 <위대한 사랑>과 더불어 10만여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황을 기록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태백산맥>이 전해오지 않는 가운데 그나마 가장 근접한 시기에 쓰여진 <고목>이 그 무렵 함세덕의 사상과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자료로 남아 있다.
  1947년 월북했던 함세덕은 1950년 6월29일, 남으로 내려오다 신촌 부근에서 폭탄 파편을 맞고 적십자 병원에서 수술 도중 사망했다. 그가 종군의 임무를 띠고 남하했는지, 아니면 월남이 목적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상반된 의견이 있다. 한 가지 확실한 증언은 그가 떠날 때의 양복 차림 그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남하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이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월북한 함세덕은 북에서도 4.3항쟁을 다룬 <산사람들>, 이승만을 비판한 <대통령>을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북의 연극사에서는 오히려 일제하의 부르죠아 희곡작가 정도로 언급되어 있다. 해방기를 전후해 남,북한 양쪽에서 활동했던 그가 양쪽 모두로부터 경원시되었던 것이다. 엄격한 이데올로기적 재단이 함세덕과 같은 작가가 설 자리를 없애버린 셈이다.
  함세덕의 10년 남짓한 극작활동기간은 20세기 한반도 역사의 가장 험로에 속했다. 따라서 함세덕의 굴절과 변모는 단순한 기준에 의해 평가될 일이 아니다. 즉, 해방기에서 함세덕의 진보적 연극운동 가담이 정치적 압력이나 시대적 분위기에 휩쓸린 행위로 폄하되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먼저 지적할 수 있다. 만약 함세덕의 진보적 연극으로의 변모가 이데올로기적 편견이 극심한 토양이 아닌 곳에서 본다면 의식의 변화에 따른 작품세계의 변모 정도로 평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은 물론 함세덕에 국한될 문제가 아니다. 진보적 연극운동을 주도했던 다른 극작가들과 더불어 연극사와 희곡사 안에 충분한 애정으로 수용되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함세덕의 비극적 삶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며 그 비극은 아직도 끝을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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