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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박동화 시리즈 2 - '그래도 막은 오른다')

기간

2007-07-14~2007-07-15

시간

토 19:30 / 일 16:00 19:30 (100분)

장소

연지홀

가격

일반 12,000원 / 청소년 7,000원

주최

한국연극협회 전북지회

문의

(063) 277-7440

공연소개

독백 (박동화 시리즈 2 - '그래도 막은 오른다') - 2007전라북도무대공연지원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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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정  수  作 /류  경  호  演出

◈ 작품 의도

희곡작가이자 연출가 박동화는 현대 전북연극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다. 그의 삶과 작품들은 최근까지도 전북연극사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타계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전북연극과 관련된 이야기의 서두는 꼭 그로부터 시작된다. 전북연극의 개척자 박동화는 이미 전북연극계의 신화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를 만나본 적 없고, 작품을 본 적도 없는 후배 연극인들에게까지 그는 여전히 이어 받아야할 정신과, 뛰어 넘어야할 벽이라는 이중성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런 양상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해방 이후 전북연극에 박동화처럼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 관한 많은 회고는 '고난의 시기에 불같은 열정'이 압도적이다. 작품의 객관적 평가도 충분하지 못했고, 사후 각색된 한 두 작품을 제외하고는 그의 작품이 무대에 올랐던 적도 없다. 갈수록 전설적 인물이 되어가는 그와, 반면에 시간이 흐를수록 잊혀져가는 그의 작품은 강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예술을 그 성과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전북연극의 왜소함을 초래하는 일이기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박동화는 전북연극의 중요한 시기에 하나의 거울이었다. 그의 작품은 당대의 전북연극,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의 감성 한 자락을 분명 보여주고 있으며, 사후 전북연극의 흐름에도 상당한 영향을 드리우고 있다. 그러기에 박동화를 보다 정확하고 차근히 바라보는 일, 그리고 작품을 통해서 그를 이해하고 그의 작업을 평가하는 일들이 바로 그 이유로 더욱 절실해진다.

이 작품은 연극인 박동화의 삶과 작품세계를 통해 박동화의 내면을 유추해보는 한편, 예술가로서의 삶과 고난의 길을 밀도 있게 고민해보고자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어찌 보면 막연히 신화 속에 갇힐 우려가 있는 박동화를 우리 곁으로 다시 끌어내고자 하는 일이기도 하다. 박동화의 삶은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 많은 예술인들의 삶과 공유된 것이라는 점을 이 작품은 주목한다. 그러므로써 한 예술가의 삶의 궤적을 단순히 표현하는 것에서 벗어나 예술과 인간에 사이의 보편적 고뇌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 작품 방향

<독백>은 박동화의 삶과 작품 활동의 단순한 연대기적 서술을 지양한다. 그가 어느 시기에 어떤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며, 어떤 의도를 갖고 작품 활동을 해왔는지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전개방식으로는 이 작품이 원하는 보다 깊이 있는 주제 표출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작품이 중심에 내세우고 싶은 주제는 한 예술가의 정신세계에 관한 탐험이다. 작가의 작품 이면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인간적 고뇌와 더불어 그가 살아온 사회와의 수시로 벌어지는 충돌이다. 어떤 예술가의 작품도 당대의 사회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 더구나 현실과 밀접하게 교우하는 연극이라는 장르는 더욱 더 긴밀한 관계에 놓여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연극인 박동화의 외적인 활동 보다는 의식 내면을 보다 밀도 있게 그려내는 작업을 우선 순위에 둔다.

그러므로 사실주의에 입각한 극 전개방식보다는 주인공의 내면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하고 진지한 표현방식을 적극 채택하여 극을 입체화 하는데 주력할 계획이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박동화가 존재할 수 있다. 아직도 무대 주변을 떠도는 영혼으로서의 박동화가 과거의 연극풍토와 현재의 상황을 이어주기도 하고, 박동화가 본인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모든 예술가의 작품에 담긴 정서나 정신은 곧 그 자신이라는 확신 때문이며, 그와 같은 동일시가 박동화 작품에서는 특히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박동화가 남긴 실화를 중심축으로 그의 작품 안의 상황을 덧대고, 그의 인간관계와 자의식과의 갈등을 통해 작품의 추진력을 얻고자 한다.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피해의식, 유일한 희망이자 도피처였던 연극작업에의 집착, 생활고와 악화되는 건강 등이 작품내의 주 갈등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 작품 구성

1. 미명의 숲에서
어둡고 텅 빈 무대, 한 남자가 서 있다. 그는 박동화다. 몇 십 년의 시간을 넘어서 여전히 무대를 지키고 있는 그다. 무대를 사랑하는 모습, 관객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하려 하는 노력, 사람들의 삶에서 연극적 요소를 발견하는 노력 등은 살아 있을 때의 박동화를 직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무대를 지키는 일종의 수호신으로서의 박동화, 이 작품의 나레이터로서의 박동화가 등장하면서, 관객들에게 신비한 연극적 체험을 넌지시 제시한다.

2. 무대 없는 연극 없다
60년대 유일한 공연장이었던 시민회관. 하지만 조명시설과 무대시설은 공연이 불가능했다. 공연시설 없는 연극문화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박동화는 도지사를 직접 설득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말이 설득이지 일인농성과도 같은 일종의 협박성 압력이었다. 피해 다니는 고위공무원들과 무작정 쫒아 다니는 박동화의 질긴 추적이 중심을 이룬다. 
공무원들과 밀고 당기는 오랜 싸움 끝에 결국 박동화는 시민회관의 무대 개보수와 조명시설을 갖추는 성과를 얻어내고, 이 극장은 상당 기간동안 박동화 작품의 주요 발표 무대가 된다.

3. 언론은 누구 편
당시 언론은 대부분 정치와 사회에 집중하고 있었고, 문화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었다. 박동화는 이 점이 못마땅했다.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의 신문으로는 일반인들에게 연극을 알리기 태부족이라고 생각한 박동화는 지방지들의 관심을 강력히 요청한다.
그러나 박동화의 집착에 가까운 요청에 불만을 품은 한 기자가 박동화에 관해 비아냥거리는 발언을 하여 둘 사이에 시비가 붙게 되고, 결국 박동화는 모래주머니를 차고 신문사를 찾아가 윤전기에 뿌리겠다는 극단적인 협박까지 감행하게 된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굽히지 않았던 박동화는 억지에 가까운 농성 끝에 결국 그 기자의 사과와 더불어 책임자의 협조를 이끌어 낸다.

4. 돈, 돈, 권력
돌출적인 박동화의 행태는 그가 근무하던 대학 안에서도 문제 거리가 되었다. 총장에게 강력한 시정 권고를 받은 박동화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매일같이 본업이 학교신문편집보다 학생들과의 연극 연습에 몰두하는 박동화, 거기에 술값을 대느라 가불을 일삼기는 하지만 박동화는 다른 측면으로 이 일을 바라본다.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박동화는 지나치는 총장의 차량을 보면서 그의 친일행적을 떠올린다. 더불어 자신의 일제 치하에서의 기억들, 육이오 동안 겪였던 많은 고통들이 반추되어 나타난다. 술 취한 박동화의 속마음을 통해 그의 돈과 권력에의 증오가 어떤 이유로, 어떤 형태로 형성되었는지 바라볼 수 있다.

5. 사람이 있어야
연극 지망 대학생들을 포섭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박동화와 그의 몇 몇 후배들. 특히 여자 배우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가능한 남자 배역들만 출연하는 희곡으로 작품을 바꿔나가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여배우 스카웃작전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다. 
남자 배우들에게는 연극을 할만한 아가씨와 교제하기를 권유하고, 여고생부터 미리 대학 연극반에 발을 들여놓게 한다던가, 방송국 여자 성우와 교환출연 조건을 제시하는 등, 백방의 노력을 다하지만, 연극 연습도중 도망치는 배우나 부모의 반대로 끌려가는 여배우들을 잡기 위해 비 오는 대로에서 무릎을 꿇기도 한다.

6. 오래 된 그리움
아내의 월급날. 박동화는 장수 어느 시골학교에 근무하는 아내를 찾아 나선다. 생활비를 받아오기 위해서다. 퇴근을 하는 아내의 모습이 안쓰럽다. 그 날 폭설이 내리고 박동화는 아내의 자취방에서 버스가 다닐 때까지 기다린다. 오랜만에 아내와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지만 이야기를 통해 박동화는 오히려 깊은 연민의 통증만을 느낀다. 전편을 통해 박동화의 가장 서정적 모습이 드러나는 장이다.
눈 쌓인 시골에서 모처럼 아내에게 행복한 시간을 주었던 박동화가 돌아오려 하던 날, 아내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쓰러진다.

7. 사는 연습
병원에 입원한 아내 대신 집안일에 더욱 관심을 쏟지 않으면 안 되게 된 박동화, 하지만 번번히 둘째 아들, 딸과 마찰을 일으킨다.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엄하게 대했던 그에게 아이들은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어느 날, 술을 마시고 걸어오는 아버지를 슬그머니 피하던 딸 의원을 발견한 그는 딸을 꾸중하게 되고, 딸의 거센 반발을 받는다.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박동화. 가장으로 제대로 된 삶을 살지 않았다는 자괴감으로 몸부림친다. 그러나 결코 아이들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말 할 수 없었던 전통 가부장적 사고의 박동화는 그 나름의 슬픔을 혼자 간직할 길 밖에 없다. 돈과 안락한 삶,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연극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그려지는 장이다.

8. 지재야! 지재야!
외국 생활을 하는 아들이 늘 그립지만 내색하지 못한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연극이라는 예술의 장래를 교차시켜 만든 작품 <상쇠>에 박동화는 많은 것을 담는다. 아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사용하여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보였으며, 나이차가 많은 부부에는 자신의 부부를 그렸다. 법에 의한 문화 보호나 상혼에 눈을 뜨는 예술에 강한 현실인식을 드러내보였고, 연극의 순수성, 예술의 순수성을 어떻게 지켜야할 지를 작품 안에서 역설하였다. 
이 장에서는 작품 <상쇠>의 제작 과정을 중심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있던 박동화의 심리적 동요와 갈등, 집념 등을 표출 해 보인다.

9. 통증
아내의 병간호 중, 박동화는 갑자기 옆구리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말이 어눌해져 아직 완전한 회복을 하지 못한 아내에게 박동화는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며칠 뒤, 평소 좋아하던 정종을 마시다가 쓰러지는 박동화, 병원에 실려 가게 된다.
병원에는 많은 후배들이 들락거리고, 병실의 분위기조차 다르다. 마치 연극연습장과 같이 변한 병실. 글을 쓸 수 없어 구술에 의존할 때, 딸은 가장 큰 내조자가 되었다. 이제야 서서히 아버지를 이해하는 딸과 아버지의 관계가 잔잔히 표현된다.

10. 누가 등잔불이 될까
자신의 생명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는 박동화.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후배들의 모습은 그저 위태위태할 뿐이다. 생활 때문에 연극판을 떠나거나, 직장 문제로 극단에 헌신적이지 못한 후배들을 한편으로는 이해하지만, 아쉽고 서운한 부분도 있다. 자신이 뿌려놓은 전북연극이라는 씨앗을 튼실한 나무로 키워낼 후배들이 간절하기만 하다. 
박동화는 이런 기분을 희곡 <등잔불>에 담는다.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구술하는 대사 하나하나에 담는 사이,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된다. 병원 측의 만류를 뿌리치고, 휠체어를 타고 연습장면을 지켜보던 박동화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등잔불>의 대사를 함께 되뇌며 앉은 채로 숨을 거둔다.

11. 그래도 막은 오른다.
관객들에게 꿈과 삶을 이야기하는 박동화. 그에게 있어 꿈과 삶은 무대와 다름 아니다. 결국은 공연 무대에 관한 이야기로 귀결되고, 수십년전 공연 문화와 21세기 현대의 공연 문화가 자연스럽게 논의된다. 
연극과 인생,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흉내냄으로써 서로 너무 닮아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면모를 보이는 이 두 삶에 대한 진지한 화두를 박동화와 다른 출연자들이 관객들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던진다. 
일종의 정신적 유희와도 같던 이 놀이가 끝날 무렵, 박동화는 자신이 관객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독백으로 전한다.

◈ 박동화의 삶과 작품세계

1. 박동화의 삶
박동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파극이 공연되던 해인 1911년 4월 21일,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월악리에서 농부인 아버지 박인태와 어머니 엄씨 사이에 셋째로 태어났다. 박동화 위로 1남1녀를 둔 모친은 그가 세 살 나던 해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러기에 그 속에서 싹튼 누이와의 정은 각별한 것이어서 박동화는 누나를 엄마처럼 따랐고, 그녀가 시집 가던 날은 아예 가마 끝에 매달려 울부짖을 정도로 그의 어린시절 유일한 정신적인 위안처는 누나였다고 한다. 외롭고 정에 주린 성장기를 가졌으리라 짐작되는 박동화, 정에 약한 성격이면서도 강직하고 고집스러운 면을 보인 것도 어린 시절 환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박동화의 작품 중 <상쇠>,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낙엽>, <孔社長>등에서 젊은 후처가 등장하는 상황 설정은 그런 면에서 특기할 만하다. 
유달리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으로 목포 영흥학교를 졸업한 박동화. 그가 결정적인 삶의 전기를 맞은 것은 20세 전후의 서울 유학 생활에서였다. 어떤 계기로 박동화가 서울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다만 그 무렵 그를 알던 사람들은 그를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고학생으로 기억한다. 불교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시인 서정주, 연극인 서항석, 이광래 등과 교우가 활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연극활동에 전력을 다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931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신극운동에 참여했다. 그 당시 연극계는 극장 부족, 제작 부실, 창작극 부족, 배우 부족 등의 내적인 어려움에다 일제의 검열 강화라는 외적 압력의 진통으로 지지부진한 상태였다가 1931년 7월 동경유학 출신들인 서항석 등 해외유학파가 중심이 되어 본격적인 신극 단체인 <극예술연구회>를 구성하여 심기일전하던 때였다. 이 <극예술연구회>는 1932년, 직속극단인 <실험무대>를 두고 극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면서 연극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1936년 <동경학생좌>에 입단, 극작과 연출수업을 했고, 1937년에는 한글잡지 <목포호남평론>의 편집국장을 지내며 소설 <동냥개>와 장막극 <황금광상곡>을 이 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같은 해 몰르에르작 <수전노>에 배우로 출연했다고도 하지만, 아무래도 그는 희곡창작에 주력했다고 볼 수 있다.
또 1940년대에 들어서도 이광래와 <중앙무대>를 창단, 자신의 희곡 <황금광상곡> 등 수 편의 희곡을 무대화하는 등 극단활동을 활발히 해나갔으나, 1942년 일본경찰에 체포되면서 활동을 중단했다. 이 시기가 일제의 국민연극운동 시대다. 연극의 어용화를 꾀하여 유치진, 함세덕 등이 친일극을 쓰고 모든 극단들이 일어극을 강요당한 바로 그 때였다.
1942년 봄은 박동화에 있어서 잊지 못할 시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기와 희곡작품들을 일경에 압수당하고 혹독한 고문과 연극활동 탄압은 그로 하여금 일제에 대한 치 떨리는 증오심을 갖게 만들었다. 더불어 친일세력에게는 증오의 눈길을 버리지 않고 살게 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감정의 일단은 그의 노년기 일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수감생활에서 풀려난 박동화는 멀리 신의주로 떠난다. 이 도피행각에는 김수산이라는 당시 배화여고를 갓 졸업한 여인이 동반되었다. 별 희망이 없어 보이는 연극인 박동화를 우연히 공연장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엄격한 집안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3세 연상인 그를 따라 과감히 신의주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떠난 그녀는 이후 평생 박동화를 그림자처럼 지켜보며 헌신적으로 내조하는 아내가 되었다.
신의주 생활 3년만에 해방을 맞았다. 그는 곧장 서울로 돌아와 <시민극단>을 창단하고 연극활동 재개에 나섰으나 극한 이데올로기 대립형 박영상의 권유로 <군산민보> 편집국장으로 전북과 인연을 맺게 된다.,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 변변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미군정청 통역관이었던 6.25는 그가 군산으로 옮겨온 지 채 일년도 되지 않아서 발발했다. 6.25는 박동화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시련과 상처를 남겼다. 점령당한 군산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군산형무소에서 3개월간 수감되어 있다가 사형의 고비까지 맞았다. 다행히 평소 안면이 있던 어느 사람의 도움으로 그 자신은 구사일생 했으나, 죽음의 위기를 넘긴 안도의 한숨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과 형수, 조카, 그리고 그의 셋째아들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가 <목포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하던 그에게 1956년 전북대학교 대학신문 편집국장으로 오게 되면서 전주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전주시 중노송동 1가 292번지. 다세대가 사는 전셋집에서 여섯 식구를 거느린 중년 가장의 연극을 향한 꿈이 다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1959년 서울의 어느 극단에서 의뢰했던 작품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를 들고 상경했다가 극단 사정상 공연이 불가 통보를 받았는데, 한 기자의 권유로 마감일자를 이미 이틀이나 넘겨버린 국립극장 현상공모에 가까스로 응모, 당선작으로 뽑히게 되었다.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가 당선됨을 계기로 그는 폭발하듯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61년 박동화의 첫 연출로 출범하게 된 <전북대학교 극예술연구회>의 정기적인 공연도 박동화 희곡 양산의 동기가 되었다. 그는 또 <전북대학교 극예술연구회>로부터 독립된 전문극단 <창작극회>를 창립시켜 극단 대표와 극작, 연출의 1인 3역의 고된 작업을 기꺼이 감수했다. <창작극회>는 박동화 희곡을 무대화하는 산실로 그 생전 42회 공연을 기록하면서 각종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수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고, 현재까지 전북연극의 대들보로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한편 박동화는 예총 전북지부 창립위원장을 맡아 1962년 예총 전북지부 창립의 산파역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1965년 제 4대 예총 전북지부장, 그리고 초대부터 7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연극협회 전북지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글을 쓰기 힘들어졌을 때에도 희곡을 구술했다. 때로는 그의 아내에게, 딸에게, 후배에게 시켰던 구술작업은 유명한 일화로 회자되면서 그의 남다른 집념을 보여주는 예로 사용되었었다.
1978년 6월 22일, 박동화는 그의 마지막 희곡 작품이자 공연작품인 <등잔불>의 공연을 마친 후, 지병인 간경화로 고집스러움과 소년 같은 순수함으로 가득 찬 눈을 감는다. 1978년 6월 24일 전라북도 최초의 <문화예술인 葬>이 치뤄지면서 박동화의 67년의 삶이 막을 내렸다.

2. 박동화의 작품세계
박동화의 남아있는 희곡 중 상당수는 세태풍자 희곡의 범주에 속한다. 그만큼 자신의 작품 주제를 빈번하게 풍자의 대상으로부터 발견했다. 그의 풍자는 크게 두 방향을 겨냥한다. 하나는 사회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이면 보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양면성, 부조리성을 포함하는 대자아적 풍자다.
전자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59년〈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62년〈여운〉, 71년〈이유있다〉, 73년〈孔사장〉등이 있고,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63년〈상실〉, 75년〈상쇠〉, 77년 〈사는 연습〉, 78년〈등잔불〉등을 꼽을 수 있다.
박동화의〈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는 그의 문단 공식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다. 그만큼 박동화 작품 중에서는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그 역시 개인적으로 애착을 가장 많이 보인 작품이다. 따라서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를 이해하는 것이 박동화 이해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3막 5장으로 이루어진 장막희곡으로, 무고한 어느 교사를 순간적인 감정으로 사형을 구형하고 난 후 죄책감과 죄의식으로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리다 공직을 사퇴한 전직 검사의 도덕적 갈등과 사랑을 그려낸 작품이다. 6·25때 아내를 잃어버린 젊은 검사가 갖는 붉은색증후군을 모티브로 이에 희생된 교사의 딸을 등장시켜 다소 도식적인 인간관계와 진부한 사랑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그러나 괄목할 만한 풍자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권력과 부의타락, 무기력한 지식인, 개인적 보복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남용 등이 바로 그 풍자의 대상에 올라 있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악에 대한 증오, 권력과 부에 비타협적인 태도는 이후 박동화 희곡의 일관된 주제로 등장한다. 또 한편으로는 이 작품이 작가 자신의 창작열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박동화는 이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의 독백을 통해 부패와 타락의 극을 달리는 시대상황을 엄중히 경고함과 동시에 그 시대를 사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투철한 신념을 중의적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여운〉은 독재자의 고위 하수인 '이철수' 일가의 몰락을 그린 장막희곡으로 자유당 시절 세도를 떨쳤던 '이기붕'을 소재로 취해 4·19를 간접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유있다〉는 1971년 전주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전주고등학교 화재사건을 소재로 방황하는 청소년의 심리적 갈등을 압축시켜 놓은 단막희곡이다. 비정상적인 교육정책과 참교육부재현장 속에 숨가빠하는 현장교육의 현실을 감수성이 예민한 10대의 고뇌와 함께 극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나름의 성과를 얻고 있다.
또〈孔사장〉을 통해 힘 있는 자와 내통하여 부를 축적하면서 퇴폐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부류들을 희화화시켜 보여주면서, 박동화는 고도성장 우선주의의 경제정책 아래 권력과 결탁하여 혜택을 독점했던 일부 졸부층의 무지와 타락상에 칼날 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처럼 박동화의 사회적 현상에 대한 비판 의지는 정치를 비롯한 경제, 교육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의 다양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다양함에 비해 그의 의지는 단조롭기까지 하다. 즉 불의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정의감, 사회 어느 구석이든 정의가 바로 실천되고, 그래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그 의지의 모든 것이다. 
박동화 희곡 중 또 다른 유형의 대표적인 예는 <상실>과 같은 작품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유형의 희곡들은 그 화살을 박동화 자신에게 향하게 하고 있거나, 스스로 자신의 문제임을 드러내 보여준다. 〈상실〉에서 보여주는 자아분열적 혼돈은 박동화가 겪고 있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과 다름 아니다.
<사는 연습〉도 예외가 아니다. 형식은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는 일곱 명의 환자로 하여금 일정한 줄거리 없이 자유롭게 대화, 독백, 방백하게 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그들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곧 박동화의 대사회적 발언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병자들의 분망한 대화는 박동화가 그의 희곡에서 빠뜨리지 않는 돈, 권력, 비굴한 삶에 대한 풍자를 행하는 통로다. 이들의 대화 도중, 늘 끊임없이 행복을 찾는 소녀의 질문은 생의 진정한 행복에 관한 박동화의 강한 의문제기라고 볼 수 있다.
〈상쇠〉에서는 박동화의 인생관과 예술관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 보인다.〈상쇠〉는 박동화의 희곡 중에서 가장 적은 3명의 등장인물을 가진 단막극이며 기다림을 주조로 한 서정극이다.
〈상쇠〉의 주인공 '이상수'는 바다가 보이는 어느 외딴집에서 나이 차이가 많은 기생출신 부인과 살고 있는 꽹과리의 명인이다. 죽음이 가까운 그의 유일한 소원은 십 년 전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와 대를 이어 상쇠가 되는 것이다. 어느 날 국악을 현실적인 돈벌이에 활용하는 옛 제자가 찾아와 보다 편안한 삶의 길을 권하지만 그는 완강한 고집으로 맞선다.
이 작품의 노상쇠는 곧 박동화다. 세 사람이 대화를 주고 받는 단순한 형식 안에 전통의 계승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소화하고 있는 이 작품 속에 '이상수'가 꽹과리에 갖는 강한 집념과 자부심은 박동화가 연극을 향해 불태우는 열정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박동화의 마지막 작품〈등잔불〉은 그런 의미에서 훨씬 절실한 면을 보여준다. 노학자 '황태일'의 입을 통해 박동화는 전북연극의 미래를 담당할 후배 연극인들에게 자신의 유언을 실어보내고 있기 때문다. 꺼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전북연극'이라는 등잔불은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주는 모습이며, '안구(眼球)'로 상징된 '의식(意識)'의 전수가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같이〈상쇠〉에서 '이상수',〈등잔불〉에서 '황태일'이라는 인물을 박동화로 환치시키면 그들의 대사 하나 하나가 바로 박동화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다. 박동화는 그의 말년에 대표적인 이 두 작품을 통해 그의 생을 정리하면서 그가 갖고 있던 연극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우리문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보여주고 있으며, '권력과 부'라는, 그가 생애를 통해 가장 경계하고 증오했던 대상과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자세와 소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이것으로 그는 그 자신의 연극이 왜곡된 권력과 금력에 항거하는 치열한 싸움이었으며, 그로부터 핍박받는 삶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박동화의 연극은 일관된 주제의식 아래 그가 집요하게 추구했던 권력과 부의 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한 시대를 성실하게 살아온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갈등과 고통은 일면 그의 작품을 한의 문학이나 나약한 패배주의자의 냉소적 문학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그의 삶이 뒷받침하고 있는 건겅한 도덕성은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그의 희곡문학의 단단한 기둥이 되고 있다.
박동화는 탁월한 풍자작가였다. 그의 풍자는 정치적 억압이나 사회적 모순 등을 가리지 않고 인간의 본능적이며 기본적인 척도인 양심이 허락하는 범주를 벗어난 것이면 무엇이든 그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희곡은 그 시대나 사회상, 혹은 그가 속한 집단이거나 환경 안에서 그에게 포착된 가장 절실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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