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2009-11-20~2009-11-20
시간
19:30 (90분)
장소
모악당
가격
S 7,000원 / A 5,000원
주최
전주시 / 전주시립교향악단
문의
(063)281-2748, 274-8641
전주시립교향악단 제165회 정기연주회
“巨匠들의 交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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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Profile]
지휘 강석희 Seok-Hee Kang, Conductor
지휘자 강석희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하였다. 재학 시 동아음악콩쿨, 중앙음악콩쿨에 입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창악회, 아시아 작곡가 연맹, 미래악회 등에서 여러 창작곡들을 지휘하였고,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지휘연구원에 발탁되면서 본격적인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1991년 오스트리아 그라쯔 국립음악원 지휘과에서 수학하였고, 1993년 오스트리아 짤쯔부르크 국립음악원 모짜르테움에서 관현악지휘 및 합창지휘를 전공하여 두 과정 모두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여 디플롬 및 Magister를 취득하였다. 유학 시 Budapest Symphony Orchestra와 Nuernberger Symphonker를 지휘하였고, 귀국 후 KBS 교향악단, 수원시립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 부천시립교향악단,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국내 유수 교향악단을 지휘하며 활발히 연주활동을 하는 지휘자로 주목받고 있다. 오페라와 현대음악까지 폭넓은 음악을 소화해내는 그는 수원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를 역임하였고 현재 전주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단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바이올린 l 김혜진 Hye-Jin Kim, Violinist
음악의 깊은 해석과 성숙한 감수성, 연주자로서의 아름다움을 겸비한 바이올리니스트 김혜진은 미국과 유럽, 극동지방을 무대로 하여 솔로이스트로, 실내악 연주자로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다. 10세에 뉴서울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데뷔무대를 시작으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뉴저지 심포니 오케스트라, BBC 콘서트 오케스트라, 러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하노버 챔버 오케스트라, 아스펜 콘서트 오케스트라, 커티스챔버 오케스트라, 산타페 프로 뮤지카 챔버 오케스트라, 서울시향, 수원시향, 등과 협연하였다. 특히 15세에 지휘자 없이 이끈 하노버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모차르트 콘체르토 연주는 어린나이에도 남다른 음악성과 리더로서의 가능성을 입증시킨 바 있다. 예후디 메뉴힌 바이올린 국제콩쿨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콩쿨 우승자인 김혜진은 국내외 유수 콩쿨을 석권하며 세계 무대에 진출하였다. International Competetion for Young Violinist(러시아) 특별상, 21세기 러시아 비르투오조 콩쿨 현악부문 우승과 청중상 및 전체 특별대상, 아스펜 음악제 바이올린 협연 부분 우승, 필라델피아 Astral National Auditions, 한국일보 콩쿨, 이화-경향콩쿨 1위 등 세계 곳곳에서 그녀의 재질이 입증된바 있다. 근래들어 실내악 주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혜진은 말보로, 라비니아, 엔젤파이어, 프러시아 코브, 브란덴부르그 앙상블, 서울 스프링 페스티벌과 같은 세계 각지의 주요 챔버뮤직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연주를 하였다. 특히 2009년 말보로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 음악의 대가 미츠코 우치다 (Mitsuko Uchida)와의 모차르트 피아노 트리오 연주는 대가와의 소통, 신선한 해석으로 높이 평가를 받았다. 한국 외교통상부의 문화사절단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UN본부, 짤츠부르그 Mirabel Schloss, 스위스 쮜리히,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순회연주를 가졌으며 국내에는 2007년 창단한 금호-아시아나 솔로이스츠 연주자로 활동 중이다. 14살에 커티스 음악원을 입학한 김혜진은 제이미 라레도와 아이다 카바피안을 사사했으며 현재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에서 미리암 프리드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연주자 과정을 밟고 있다. 커티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Emma V. Lambrose Presidential Scholarship의 수상자이다.
[프로그램·Program]
J. Brahms /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77
브람스 /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Ⅰ. Allegro non troppo
Ⅱ. Adagio
Ⅲ. Allegro giocoso ma non troppo vivace
INTERMISSION
S. Rachmaninov / Symphony No. 2 in e minor, Op. 27
라흐마니노프 / 교향곡 2번 마단조
Ⅰ. Largo, Allegro Moderato
Ⅱ. SCHERZO, Allegro Molto
Ⅲ. Adagio
Ⅳ. FINALE. Allegro vivace
[프로그램 노트·Program Note]
브람스 / 바이올린 협주곡
이 협주곡은 브람스가 심복했던 바이올린의 명수인 요아힘의 조언을 빌어 완성한 것이다. 브람스는 한 작품씩 신중하게 만들어 갔는데, 이 협주곡을 만듦에 있어서도 바이올린 소나타와 관현악의 작곡에 자신(自信)을 얻은 뒤에, 그리고 요아힘의 조언을 받으면서 만든 것이다. 경험과 지식, 이것을 완전히 체득한 브람스의 원숙한 재능은 이 걸작 속에서 멋진 빛을 발하여, 영구불변하는 찬사를 비처럼 받고 있다. 이것은 종래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영역을 초월해서, 오히려 교향곡적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이며, 모든 협주곡의 최상에 자리하고 있다. 1878년 45세 때의 작품으로, 초연은 1879년 1월 1일 라이프찌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행해졌고, 요아힘이 바이올린을, 브람스가 지휘를 맡았다. (연주시간 : 약 45분)
제1악장 Allegro non troppo
상당히 온화한 가락이긴 하지만, 대담한 활기와 발랄한 생명을 포함하고 있어 사람들을 상쾌한 해학적 기분으로 이끌어 가고, 투명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는 깊은 황홀경으로 유혹한다.
제2악장 Adagio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듯한 깊은 친근미를 지녔다. 가요에 가까운 가락은 음악적인 이야기처럼 표현된다. 바이올린은 아득한 허공으로 그 멜로디를 날리고, 여러 가지 감정으로 노래하며, 또 이야기한다.
제3악장 Allegro giocoso ma non troppo vivace
브람스는 론도 소나타 형식 속에 그의 최고의 예술을 짜 넣고 있다. 분위기는 변화가 매우 심해서, 마치 헝가리의 산야에 사는 집시의 무리를 찾아다니며 그 음악에 접하는 것처럼 활달하게 움직인다.
라흐마니노프 / 교향곡 2번
라흐마니노프가 평생에 걸쳐 남긴 3곡의 교향곡은 1895년에 작곡되어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1897년 초연된 "제1번 d단조 op.13"을 시작으로 1907년에 작곡되고 이듬해인 1908년에 초연된 "제2번 e단조 op.27", 1918년 미국에 망명하여 1926년에 작곡한 "제3번 a단조 op.44"가 있습니다. 이러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중에서도 "제2번 e단조 op.27"은 강렬하면서도 러시아적 센티멘탈리즘이 꿈틀거리는 걸작이다. 그러나 이 교향곡이 나오기까지 라흐마니노프가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가 1897년 3월에 발표했던 "교향곡 제1번"이 예상과는 달리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게 되자 그는 그 충격으로 인해 극심한 노이로제에 시달리며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이 1번 교향곡이 연주될 수 없도록 그 스스로가 ``절대연주금지``를 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최면요법의 권위자인 니콜라이 다알 박사를 만나면서 그로부터 약 3개월 동안 암시와 최면치료를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극적인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그가 병에서 벗어난 이후 처음으로 완성해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 그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었고, 이로부터 자신감을 얻은 그는 1902년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며 그 후 1906년에는 가족과 함께 드레스덴으로 이주, 그곳에서 새로운 기분으로 창작에 몰두한 끝에 자신의 두 번째 교향곡 "제2번 e단조 op.27"을 완성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1908년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제2번"이 초연되고 난 뒤에 그의 조국 러시아는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만다. 1917년 레닌을 앞세운 불셰비키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에 붉은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예술적 진로를 위해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1918년 초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길을 택한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그해 가을 가족을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으며 미국에서 음악적 인정을 확실히 받으면서 중년과 만년을 이어 연주와 작곡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