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2013.01.04(Fri)~2013.03.03(Sun)
시간
10:00~18:00 (입장마감 17시)
장소
한국소리문화 전시장 [갤러리S, 갤러리O, 갤러리R]
연령
가격
성인 10,000원 유아초중고 8,000원 (36개월미만 증명증제시시 무료입장)
할인
주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JTV전주방송, 중국곡부시공자촉진위원회
문의
063)270-8000, 7844
“황하”를 알면 “중국”이 보입니다.
오천 여 년이라는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이젠 세계중심국으로 급부상하는 중국, 중국의 대표적 고대문명인 황하(黃河) 문명, 중국 황하문명의 중심지 陝西省(산시성, 秦始皇)과 山東省(산둥성, 孔子)의 문물을 전시 소개하여 전라북도민들이 직접 보고 체험하며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우리의 전통 문화 유산과 비교 평가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의 장을 제공한다.
공자(BC 551 ~ BC 479)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대 철학자 ․ 사상가 ․ 유교의 시초이고, 진시황(BC 259 ~ BC 210)은 거대 제국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의 시조이다. 초․중․고교 학생들로 하여금 “공자 & 진시황 문명전”을 통해 중국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의 폭을 넓힐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의 장,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계기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다가오는 서해안 시대, 그리고 중국을 알기 위한 교육적 전시의 개최
1980년대 후반 대중국 교역 확대와 함께 서해안이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교역에 유리하며, 남동권의 과밀화에 따른 국토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토의 균형 개발 정책이 추진되면서 서해안이 경제 개발의 핵심 축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의미함에 있어서 “공자 & 진시황 문명전”을 통해 중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다양한 체험 코너와 중국 유학생과 함께하는 전시를 통해 도민들에게 중국의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고 어린이 및 청소년들에게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자리하고자 한다.
□ 전시구성
MAIN GATE | 공자와의 만남 – 공자 생애 및 제자 사진 전시 50여점
역사 안내관 | 공묘 탁본 10여점, 청동기 15여점, 토기 15여점 전시
병마용관 | 진시황릉 발굴 재현 / 병마용 – 36건 전시
유물관 | 황릉 발굴 당시 출토 유물 / 진시황 청동마차
중국미술 | 중국 농민화 / 국보급 탁본 15여점 / 한 대 채색도자기 20여종, 토용 등 전시
문화체험 | 도예체험, 탁본체험,
중국 악기 및 몽골 전통 가요, 가무 공연 (공연시간 : 11시 30분 2시 4시 30분 / 진행시간 15~20분)
▶ 동아시아 인문주의의 원형이 된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 孔子 (BC 551~BC 479)
공자는 기원전 551년 오늘날 중국의 산둥성 취푸(曲阜) 동남쪽에서 하급 귀족 무사인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顔)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이고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공자를 일컫는 영어 콘휴셔스(Confucius)는 존칭인 공부자(孔夫子)의 라틴어식 표기이다. 공자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정상적인 혼인 관계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공자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였으며, 19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20살 때부터 계(季)씨 가문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주나라 관제와 예법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예(禮) 전문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35살 때 노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 소공이 제나라로 망명하자 공자도 제나라로 떠났다가 2년 뒤 귀국했다.
공자가 48살 때 계손씨의 가신 양호가 정권을 잡자 공자는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공자는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다.
기원전 500년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회담할 때 공자가 의례를 맡아 노나라가 빼앗긴 땅을 돌려받음으로서 공자의 명성이 드높아졌다. 이 시기가 공자의 정치 생활에서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공자는 계씨를 비롯한 삼환 씨 세력을 타도하려다가 실패하고 한 무리의 제자들과 함께 고국을 떠났다.(기원전 497년) 이후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14년만인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 때 공자의 나이 68살이었다.
이후 공자는 노나라의 악(樂)을 정비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문헌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그러나 가장 아끼는 제자 안연이 세상을 떠나자 깊은 실의에 빠졌다. 온몸으로 흐느껴 우는 공자를 제자들이 말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위해서는 울고 싶은 만큼 울게 내버려두어라.’ 애제자를 떠나보낸 슬픔 가운데에서도 공자는 기원전 481년 [춘추(春秋)]를 완성했다. 72살 때는 역시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에서 일어난 정변에 휘말려 피살되었다. 이번에도 공자는 제자를 위해 곡했다. 그리고 기원전 479년 73살 때 공자는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언덕에 묻혔다.
▶ 절대자 진시황제, 천하를 통일하다!
진시황 秦始皇 (BC 259~BC 210) First Qin Emperor
진시황제는 장양왕(莊襄王) 자초의 아들로 성은 영(赢), 이름을 정(政)이라 했다. 13세에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여불위와 노애가 권력을 쥐고 흔들었기 때문에 직접 친정을 시작한 때는 기원전 238년부터이다. 이후 이사(李斯) 등을 등용하여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는 것)과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BC 230년부터 BC 221년 사이에 한(韓) ·위(魏) ·초(楚) ·연(燕) ·조(趙) ·제(齊)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39세의 젊은 나이에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통일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한 시황제는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 최초의 황제라는 뜻)'라 일컬었으며, 후대에는 2세, 3세 등으로 하여 이를 천만세까지 이어 나가도록 하자는 원대한 꿈을 품었지만 겨우 2세에 이르러 멸망당해 15년의 짧은 왕조로 끝나버렸다.
시황제는 봉건 영주가 각 지방을 다스리던 그때까지의 봉건제(封建制)를 폐지하고 관료를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으며, 법가 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법령을 정비하고, 문자ㆍ도량형ㆍ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 등에 힘을 쏟았다. 또한 대대적으로 확대 건설한 수도 셴양[咸陽]으로 전국의 부호 12만호를 강제 이주시키는 한편, 민간의 무기소지를 금하여 반란의 소지를 제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던 진시황은 즉위 34년에 국가와 자신에 대한 비판을 막기 위하여 의약서적과 점술서적, 농업관련 서적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그 다음 해 4백60여 명의 유학자들을 임동현(臨潼縣) 남서쪽에 생매장하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기도 했다. 또한 전국시대 각국의 장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요동에서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건설하였으며, 훗날 함양(咸陽)에 항우가 불을 질렀을 때 백일 동안 탔다는 아방궁을 축조하였다. 이렇게 무리하게 계속되는 대규모 건설 사업은 가혹한 법 적용과 함께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고 이후 진나라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성격이 사납고 신하를 엄격히 다스렸으며, 남을 신용하지 않았으나 대단히 정력적이고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갖추어 만기(萬機)를 직접 처리하였다. 또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5차에 걸쳐 전국을 순행(巡行)하며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여러 곳에 세웠다. 그러나 만년에는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는 등 어리석음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가혹한 법치를 수단으로 지나치게 급격히 추진된 통일정책은 인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결국 마지막 순행 도중 시황제가 병을 얻어 사망하자 수행 중이던 이사와 조고(趙高)는 유언을 위조하여 황자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였으나, BC 209년 이후 시작된 반란으로 진제국은 급속히 와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