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소개
윤양호 개인전
Guten Abend meine Damen und Herren
Ralf Gablik(Kunstkritiker)
미술평론가 - 예술가 ;
이번 전시는 작가의 정신적인(geistigen)면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작품은 형태자체가 이미 독립된 예술작품이며, 하나의 독립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술가는 그 기본적인 것의 변화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 모든 면에서 그는 진실한 그리고 정확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완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 목적은 묘사의 요소가 없이 정확한 것에서 감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1914년 네덜란드의 Theo van Doesburg와 Piet Mondrian의 관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Theo van Doesburg의 모든 기본적인 요소들을 정의한 내용을 보면;
* 사물로부터의 포기
* 정확성의 사용
* 그림의 요소들 - 스스로가 표현의 의도로부터 자유로움
* 예술가는 그의 진실함과 탁월한 정확성에 의해서 그 장점을 열거할 필요도 없이 집요하게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 전시를 보고자 한다.
“Gegenstaendlichkeit(대상성)”
누가 이번 작품을 보면서 대립성을 느낄 수 있는가 ? 누가 이 전시장에 들어 왔을 때 지난 3월의 나의 경우처럼 똑같은 실수를 하였는가? 당신은 이미 태양의 폭발이나 일본의 국기를 발견했는가?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늦었다!
오늘 저녁 우리는 유능한 생각의 실행으로 모든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우리의 호흡은 살아있음을 입증한다. 호흡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스스로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하루하루의 경험들은 우리 서양에서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생과 사는 하나의 불가피한 변환의 과정일 뿐, 그것을 바꿀 수 는 없다. - 개인적인 존재는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며 -
모든 존재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박물관의 유물들을 예를 들어 보면; 당신은 하나의 허구성을 믿는가?
3000년 전에 유물이 고고학에서 교회의 벽에 사용된 장식품들과 숭배했던 사물들이 현재에 발견 되었다. 한 신문에서 그것이 성채의 상징적인 것에 대한 발견의 속임수에 대해서 공개하였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모든 것은 신성한 것으로 제시하는가? 최근에 우리는 그것이 오늘의 의도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볼 수 있는가? 모든 사물의 사실적인 정체성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서양은 현세의 삶이 영원하다는 생각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YOON은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통해서 삶과 예술을 매력적으로 보여준다.그는 또한 세계와 관념사이의 벽을 허물고 있다. 이러한 상상의 근거는 현세와 과거의 문화적 독창성이 서로 닮아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항상 믿어왔던 것보다 동양적인 믿음과 정신이 가까이 서 있는 것 같다.
중심적인 생각의 방향전환에서 생명력(Vitalitaet)을 찾을 수 있으며, 이는 윤회를 전재로 하고 있다. 생명력은 선불교(ZEN-Buddhismus)의 윤회를 근거로 하며 우리는 이를 삶의 굴레(Rad des Lebens)라고 한다. 당신은 이러한 생각들을 구체화 하고 있는가.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들은 현세에 그 믿음의 세계를 정신(수행)하는 것이다. 그 길은 인식의 변환이며 그 끝은 해탈(MOKSA)이다. 해탈의 의미는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모든 생각과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의 인식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되며, 우리가 생각을 바꿀 때에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생각과 문화적인 속성을 이해하고 이를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서 그 목적에 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윤양호는 우리에게 무엇을 소개하려고 하는가? 만약 당신이 자동차를 타고 가거나 일상의 생활들 속에서 이러한 것들을 심사숙고 하는가? 우리 서양인들은 문화적인 독자적 사고의 범주를 가지고 그 길을 걸어 왔다. 우리는 그 길을 계속해서 가야할지 멈 추 워야 할지 생각하는 시점에 서있다. - 하나의 우연한 우연 - 우리는 지금 빨간 원 앞에 있으며, 일상에서 우리는 이러한 유혹들을 받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세상에 대한 걱정을 가지고 있으며 - 그것은 무엇이 항상 당신의 개인적인 취향을 - 계속해서 당신을 뛰어넘고, 계산하고, 느끼고, 타락한 세계를 왕래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러한 사고들로부터의 정신적인 자유는 - 그 길 그 목적 -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예수, 유대, 이슬람, 그리고 불교 등 모두 이러한 자유의 희망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우리는 새로움, 변화 그리고 고통으로부터의 극복들을 경험하게 된다.
- 모든 종파를 초월해서 -
결과적으로 이러한 모든 인식의 변화는 하나의 단어로 집약이 된다.
“ 수행(Die Meditation)"
윤양호는 우리에게 수행적인 사고를 가질 것을 요구 한다.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수행적인 습관에서 자라 낳으며, 이를 통한 인식의 변화를 위한 노력은 그에게 개인적인 능력과 질적인 특성을 통해서 하나의 공간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한 공간성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자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생각한다는 것조차 잃어버리고 오직 그 수행의 심연 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 즉 텅 빈 곳으로 -
Piet Mondrian는 자연의 분석에서부터 자신의 형식적인 면을 표현하고 있으며 명확성, 조화, 균형을 통하여 조화된 세계를 만들고 있다. 20세기에서의 그의 노력은 그의 "Kompostion"을 통해서 사물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각각의 작품들이 시각적으로 단순하면서도 정신적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모두가 우리에게는 새로움이다. 평론가가 그의 작품에 하나의 이름을 지어주기를 시도 한다. 즉 “Abstrakter Kubismus und Neoplstizismus" 이러한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른 예술가는 여기에서 자신의 작업에 영향을 받았으며 - 그는 의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은 윤양호의 작품들도 Piet Mondrian 과 같은 방식으로 분류하는가! 나는 단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보고 싶다.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없는가? 그는 이러한 분류를 원치 않을 것이며, 미술사에서도 그 위치를 명확히 하기가 쉽지가 않다.
Minimlakunst? Konstruktivismus? Psychogramme? 당신이 미술사를 정확히 이해했다면 단순성, 명확성, 수행적인 느낌 이는 20세기의 "Mark Rothko"의 "Meditationstafeln"에서 찾을 수 있다. Guenther Uecker - 공간, 빛, 움직임, 그리고 시간 이는 그가 직접적으로 선불교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Yves Klein 역시 상징적인 신체의 사용을 여기에서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는 세계적으로 자신의 청색을 상징화 하였다.
서양적 사고는 항상 완벽한 형태, 그리고 완벽한 조화, 우수한 상징을 찾기 위해 노력 한다. 하지만 동양적 사고는 모든 것이 자유롭게 사유되며 관념적 보다는 창의적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이를 표현하는 것 같다. 마치 수행적인 모습처럼, 윤양호의 작품들 또한 이러한 바탕위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